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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서평&후기/독서 노트

일본 과학자들의 천국 - 이화학연구소

1. 이화학연구소는?


일본의 유일한 자연 과학 종합 연구 기관으로 '과학자의 낙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연구 환경이 좋은 곳 입니다.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 196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도모나가 신이치로, 2001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노요리 료지 등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세계적 권위를 가진 연구 기관입니다.

 

 

2. 이화학연구소의 탄생은?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독일과 적대국이 된 일본은 그때까지 독일에 의존해왔던 화학 공업 제품을 수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본 경제의 위기로 작용하게 되었고 외국 의존에서 탈피하기 위해 과학 연구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미쓰이, 미쓰비시 등 재벌 기업이 50만 엔(지금의 1억 엔)씩 출연하기로 하면서 연구소 구상은 급물살을 탔고 1917년 이화학연구소가 탄생합니다.

 

 

3. 초기의 이화학연구소


설립 다음 해에 1차 세계대전 종식으로 전후 불황이 시작되면서 설립 초기부터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던 중 1921년 오코우치 마사도시를 연구소장으로 발탁하면서 대규모 개혁이 일어 납니다.

 

연구실을 책임지는 주임연구원 제도를 도입해 주임연구원에게 연구 테마 선정, 예산, 인사 등 연구실 운영과 관련된 모든 권한을 주고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연구 성과로 얻은 특허 및 실용 신안을 기본으로 기업을 설립하고, 이들 기업에서 특허권 사용료를 받아 연구비용을 충당한다는 구상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 63개의 기업이 탄생했고, 1939년에는 연구비의 80% 이상을 이들 기업에서 얻은 수익으로 충당할 정도까지 발전했습니다.

 

 


4. 리켄주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쌀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일본인이 즐겨 마시는 청주는 쌀을 원료로 만드는데, 당시 청주를 생산하기 위해 연간 약 400만 석의 쌀이 쓰이고 있었습니다.

 

이는 전체 쌀 소비량의 8%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이었습니다.

주임연구원 스즈키 우메타로는 쌀을 사용하지 않는 합성주 '리켄주'를 만들었고 1940년경 이화학연구소 소득의 절반 정도를 리켄주가 담당할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5. 리코


리코는 잉크를 이용하지 않고 빛과 열로 인쇄를 할 수 있는 감광지 기술을 기반으로, 1936년 이화학흥업에서 독립해 리켄감광지라는 회사를 설립한 것이 출발점입니다.

 

1963년 현재의 리코로 회사명을 변경했고 카메라, 프린터, 팩시밀리, 복합기 등 종합 OA 기업으로 발전했습니다.

2019년 3월 결산 기준으로 연간 매출액이 2조 엔을 넘는 일본 최대 복합기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6. 이화학연구소 벤처


세계 최초로 개의 알레르기 검사를 가능하게 한 기술을 바탕으로 탄생한 동물알레르기 검사(주), 유전자 전자동 분석 장치 등을 생산하는 (주)리켄제네시스, ips 세포에서 분화시킨 RPE(망막색소상피) 세포 생산을 통해 망막 관련 난치병인 황반변성 치료에 기대감을 높이고 있는 (주)헤리오스 등이 이화학연구소가 탄생시킨 대표적인 벤처기업입니다.